||0||0 본당 김해두(사무엘) 사목회장을 비롯한 40여명의 신자들은 2017년 10월 22일 부터 24일까지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22일 오전 6시 30분 본당을 출발하여 김해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오전 10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순례일정을 시작하였다.
이번 제주도성지순례의 주요 목적지는 ♧황사평순교묘지 ♧용수성지(김대건신부님 표류후 귀착지) ♧성 이시돌목장 인 것으로 안내되었다.
● 사진은
♤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성 김대건 신부 재주도표착기념관>
♤<황사평천주교 성지>)-신축 교안의 순교자 묘역
♤<정난주 마리아의 묘>
♤ 성이시돌 목장
◎용수성지(김대건신부님 표류후 귀착지)
제주도 어딜 가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마는 ‘聖김대건 해안로’ (여행 당시 이름은 한경해안도로였음)는 특히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수많은 얼굴의 풍경들이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따라 펼쳐진다. 맑은 물색과 까만 바위들, 이국적인 풍차들이 어우러져 멋스럽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 길이 끝나는 지점이 용수포구이고, 포구 뒤편 언덕배기에 용수성지가 있다.
김대건 신부가 처음으로 고국 땅에 발을 디딘 곳, 처음 미사를 봉헌한 곳이다.
성지 왼편에는 기념성당이, 오른편에는 배 모양의 기념관이 있고, 마당 한켠에는 김 신부가 타고 온 배를 그대로 복원한 라파엘호가 놓여 있다. 2008년에 건립된 기념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금가항 성당을 재현했고, 지붕은 거센 파도,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는 라파엘호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표착기념관은 2006년에 라파엘호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다.
'라파엘호' 는 1845년 김대건 신부 일행이 상해에 갔다가 돌아올 때 탔던 목선이다.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 이름을 붙인 배로 길이가 13.5m 밖에 되지 않는다.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심한 폭풍을 맞나 표류하던 끝에 이곳 제주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고, 배를 수리 한 후 다시 전라북도 금강 하류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땅을 밟을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바랑 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여행의 목적지에 닿았고, 고생도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고생도 끝났다며 이렇게 기뻐하시던 이 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들 순교 하시고 만다.(구글에서 발췌)
◎황사평천주교성지(黃蛇坪天主敎聖地)-제주의 무명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
http://blog.naver.com/wind5696/150074331470 . 신축교안- 일명 "이재수의 난"
1901년 5월 5일, 제주도 남쪽의 대정 지역에서는 '상무사'(商務社) 회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난행하기 시작하였다. 상무사는 지역민들이 설립한 사설 단체로 천주교 세력이 퍼져 나가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던 터에 부당한 세금, 지방민과 교인들의 알력, 서양과 일본 세력의 제주도 진출 등이 문제가 되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제주의 신축 교안(辛丑敎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박해 이후 한 명의 신자도 없던 제주에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8년 4월 22일 '제주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 선교사 페네(Peynet, 배)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였다. 이듬해 페네 신부는 육지로 전임되고 라크루 신부가 새로 부임하였으며, 김 신부는 한라산을 넘어 서귀포의 한논(大沓)에 정착함으로써 새 본당을 설립하였다. 김원영 신부의 활동은 실로 눈부셨다. 그의 전교 덕택에 교안 발발 직전까지 제주의 교세는 2개 본당에 신자 수 241명, 예비신자 수 62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교안은 5월 5일부터 6월 초까지 20여 일 계속되었다. 처음 상무 사원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피정차 육지에 나와 있었으므로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뮈텔 주교는 피정 중에 인사 이동을 결정하여 김원영 신부를 육지에 남기는 대신 무세(Mousset, 문) 신부를 한논 본당에 임명하였다. 5월 10일 라크루 신부와 무세 신부는 제주에 들어가 제주성에 갇혀 있는 신자들과 생사를 함께하였으며, 5월 28일에는 제주성이 난민들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학살되었다.
폭도들은 그들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여자 교우들의 새로운 학살 소식과 화재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왔습니다. 김원영 신부의 회장인 박 고스마는 묶인 채 매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 그 곳에 저의 복사 아우구스티노가 있다가 도망쳐 왔습니다. 동헌 마당으로부터 거친 소리들이 들려왔고, '천주교 아이놈은 어디에 있느냐?'는 외침도 들렸습니다. 벽장에 숨어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아, 하느님, 제 아이가 잡혔습니다. 그는 고문을 당했고, 폭도들은 그 아이의 빰에 총을 들이대고 여러 차례 발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 예수님, 성모님 …."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여 살해되었습니다(라크루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01년 6월 11일자 서한).
교안의 결과 천주교 신자와 예비신자 중에서 약 300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기록의 미비로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해 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라크루 신부의 다음 기록을 빌리면, 복사 신재순(아우구스티노)과 같은 경우에는 신앙 증거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18세의 젊은이로 순진하고 양식을 갖춘 가톨릭 신자였고, 천사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헌신적이었고, 그 밖에도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위의 서한 참조).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뒤 교안 희생자들의 시신은 관덕정 앞에 모아졌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 때 연고가 없는 시신들은 5월 말에 일단 사라봉(제주시 화북동) 아래에 묻혔다가 2년이 지난 1903년 4월에 매장지가 황사평(당시 화북 2동의 황새왓)으로 결정되면서 모두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주 신자들은 황사평을 순교자 묘역으로 생각하여 해마다 현양 행사를 개최해 왔으며, 1995년에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은 합장묘를 조성하면서 묘역을 새로 단장하여 순교 사적지로 가꾸었다. <차기진, 사목 254호(2000년 3월호), pp.76-77>
◎정난주(丁蘭珠) 마리아의 묘
제주도 대정읍 동일리(9번지)에는 정난주의 묘가 있다. 정난주(丁蘭珠)는 1773년(영조 49)에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아버지는 정약현(丁若鉉)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정약종(丁若鍾)·정약전(丁若銓)·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그녀의 숙부이다. 남편은 황사영(黃嗣永)이고, 아들은 황경헌(黃景憲)이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황사영이 탄압의 실태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두 자[약 60cm]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천 311자나 되는 한자로 적어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교회를 재건하고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보내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되어 연루자 16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단순히 미풍양속과 인륜을 어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까지 팔아먹는다고 생각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정난주는 둘째작은아버지인 약전에게 서학(書學)을 배우고, 장성한 뒤에는 고모부인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도가 되었다. 남편 황사영(黃嗣永)은 17세에 장원급제한 인물로서 정약종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정난주와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그녀의 간난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경기도 남양주의 마재로 피신하였다.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提川)의 배론 골짜기로 피신하여 천주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백서(帛書)를 써서 북경(北京)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 일로 가산은 몰수되고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되고, 정난주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향길 중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추자도 예초(禮草)리의 ‘황새바위’ 갈대밭에 아들을 내려두고 떠났다. 황경헌은 마을에 살던 노인이 데려다 길렀으며, 현재 그 후손들이 남아 있다.
제주 대정현의 관비(官碑)가 된 정난주는 대정현 토호 김석구(金錫九)의 집에 위리에 안치되었는데, 김석구는 한때 별감으로 관속이었고, 현감과는 막역지우로 그의 자문역을 자임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여서 동헌 바로 뒤에 살았다. 이곳에서 정난주는 김석구의 아들 형제를 양자처럼 기르며 살면서, 또한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다.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한양 할머니’가 죽었다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난주가 죽자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金尙集)이 그녀를 모슬봉 북녘, 속칭 한굴왓에 장사지냈다 하며, 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9번지에 정난주 묘가 있다.
천주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정난주 마리아의 묘지가 순교자묘역으로 성역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난주 [丁蘭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聖 이시돌목장
이시돌목장은 한라산 중산간지대의 16만 5000㎡에 자리하고 있다. 아일랜드 출신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1954년 4월 콜롬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온 뒤 가난한 제주도민들에게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 주고자 1961년 11월 성 이시돌 중앙실습목장으로 개장하였다.
이시돌은 중세에스파나의 농부로 하느님의 영토인 땅을 가꾸고 농사를 짓는 일에 열성을 다하였다 하여 후에 로가톨릭교회에서 정한 농님의 주보성인(聖仁)이 되었다.
1962년 비영리 사업을 위해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해 양을 키우고 양털로 양모 제품을 생산하는 한림수직과 사료공장 등을 운영하였다. 1969년부터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 면양, 종돈 등을 들여와 한때 100만 마리에 가까웠던 면양과 동양최대의 돼지 목장, 치즈·우유공장, 수천 마리의 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젖소, 한우, 경주마를 사육하고 있다.
목장 외에 성이시돌 양로원, 피정센터, 젊음의 집, 삼뫼소 은총의 동산, 천주교금악교회,성이시돌어린이집, 글라라관상수녀원, 농촌산업협회 등이 함께 있고 삼위일체대성당이 건축되는 등, 목장보다는 천주교성지로 더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